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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발해 고왕 대조영

전기실무교육원 2010. 9. 23. 20:40
대조영  







? ~ 719년 / 발해의 시조(재위699~719), 고구려 유민 / 활동분야 : 정치, 군사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요하 서쪽 영주 지방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696년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 자립을 꾀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그의 집단을 추격하였으나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더욱 규합하여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계속 동부로 이동하였다.

699년 지금의 지린성 돈화현 지역인 동모산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에 의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에 책봉되었고, 국호는 발해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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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대조영(大祚榮)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 고구려 유민. 본명 대조영.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 699년 동모산을 도읍으로 국호를 진, 연호를 천통이라 했다. 713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정책에 따라 요하(遼河) 서쪽 영주(營州) 지방으로 그의 가족과 함께 이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 지역에 억류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 자립을 꾀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거란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 그의 집단을 추격하였으나, 그는 장령자(長嶺子) 부근의 천문령(天文嶺)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더욱 규합하여 국가건설의 기반을 굳히고, 계속 동부로 이동하였다. 699년 지금의 지린성 돈화현(敦化縣) 지역인 동모산(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발해의 건국 지역은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이었으며, 첫째 아들 대무예(후에 무왕)도 계루군왕으로 불렀다.

이후 당나라는 그에게 유화정책을 썼는데, 중종(中宗)은 705년 진에 사신을 보내왔고, 고왕도 둘째 아들 대문예를 당나라에 보냄으로써 우의를 표하였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은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渤海郡王忽汗州都督)의 별직을 주고 우의를 나타냈다. 그 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고 양국은 건국 초기의 갈등상태를 극복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잊혀진 제국
 
서기 926년 1월 14일. 해동성국 대진국1)이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게 멸망한 날이다.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돈화(대진국 당시 지명 ‘곤지’) 동모산에 나라를 세운 지 258년(668~926) 만이다.
 
이 날은 단순히 한 국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이날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 공간이 만주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되고, 간도수2) 실현의 역사 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배달국 이후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던 만주대륙은 대진국 멸망 후 우리 역사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 땅뿐 아니라 그 얼과 인물들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제국, 대진국에 대해 알아보자.
 
 
대진국 건국과 대조영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진국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한다’는 뜻으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그 해 대중상이 대진국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대조영은 군사 십만을 양성하였는데, 말갈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이해고의 당 정예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당은 고구려의 전 영역이 아닌 평양지역과 요동 일대만을 점령하고 있었다. 즉 나머지 고구려의 전 영역에서는 활발하게 고구려의 부활을 위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그 결정체가 바로 대진국의 건국인 것이다. 669년부터 국제정세는 당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토번의 당 서쪽 국경의 기습, 돌궐의 재건 등은 새로 건국된 대진국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국력을 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건국 후 대조영은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여 고구려의 부활을 선언하고 고토 회복에 나서게 된다. 대진국의 본격적인 진출은 2대 광종 무황제 때 대장 장문휴의 등주 기습에서 시작된다. 견디다 못한 당현종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내리며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런데 ‘발해’는 중국이 주변국을 전부 오랑캐로 하대하는 근성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불렀을 뿐, 대조영은 ‘발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후세에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대진국을 ‘발해’라 쓰면서 지금까지 ‘발해’라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마땅히‘대진국’이라 불러야 한다.
 
 
고구려의 후신, 대진국
 
대진국은 대중상이 처음에 나라이름을 ‘후고구려’라 했듯이 고구려의 국통을 이은 나라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대진국의 광종 무황제 대흠무가 일본에 국서를 전할 때 자신을 ‘고려3)국왕’이라 칭한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일본국이 대진국에 보내는 회답서 또한 대진국을 ‘고려’라 하였으며 대진국의 사신들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하였다.
 
아울러 『속일본기』는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라는 구절로서 대진국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중국의 사서에도 도처에 대진국과 고구려가 일치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진국의 황제들 역시 단군조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으며, 고구려 건축물과 동일한 형태를 한 대진국의 온돌의 존재와 형태는 대진국이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꼽히고 있다.
 
 
해동성국 대진국, 그리고 멸망
 
대진국은 발전을 거듭하여 문물이 크게 융성하였고 영토도 고구려의 전영역과 지금의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 전성기의 1.5배~2배, 후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의 강역으로 칭제건원과 상제님에 대한 천제의식으로 천자국임을 내외에 공표하고 천하의 중심 고구려의 부활임을 내세웠다. 당, 일본, 신라, 거란 등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흠송 받았다.

고구려의 국통을 이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진국은 9세기 후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흥기는 대진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정복군주로서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유목민족이 갑자기 성장하게 되면 국가유지 비용충당을 위해 중국을 공략하는 것은 상례였고, 후방의 안전을 위해 우리 민족과는 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했다. 92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대진국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대진국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대진국의 쇠퇴와 멸망 원인은 기록의 미비로 잘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라 내분에 의해 자멸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요사는 전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리고 1990년 일본의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이란 논문에서 대진국의 멸망이 백두산의 화산폭발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대진국의 마지막 왕이 전통적인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방비체계를 확고히 하였고, 주변국가와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압박해 오는 거란군의 침입에 대응을 하였던 것이 밝혀진 만큼 대진국의 멸망에 대해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대진국을 건국한 말갈은 고구려인
 
대진국에 대한 연구는 아직 황무지나 다름없다. 아직까지 사학계에서는 대진국의 건국주체 세력이 누구인지 분명한 결론이 없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서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성분을 고려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유민으로 말하고 『신당서』에서는 속말말갈이라 하여 귀부된 고구려인으로 잡고 있다. 서로 상반된 기록들은 후대인들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고 그 정체성마저도 의심받게 만들었다.
 
우리의 대표적인 사서인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의 편견으로 대진국 부분은 빠져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말갈 발해전이라 하여 말갈을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면서 대진국의 건국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말갈이라고 하는 족속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즉 말갈을 우리와 전혀 다른 족속이라 여기게 된다면 대진국 건국주체는 이질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말갈인이 우리와 같은 족속인 것이 밝혀진다면 그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말갈(靺鞨)이라는 것은 물길(勿吉), 원래 물가라는 뜻이다. 송하강 강변에서 살던 사람을 말갈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대진국이 사라진 이유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BCE 239년 건국)와 북부여를 계승한 고주몽의 고구려(BCE 37년 건국)에서 왕건의 고려를 잇는 연결고리로 봐야한다. 그 민족적 계통의식이나 정치적 의미, 인적 구성, 문화적인 일체 감등에서 보면 한민족사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신교문화의 종주를 이룬다.
 
그런데도 대진국이 우리 역사에서 다른 왕조에 비해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이유로는 대진국의 국통을 이은 고려(918~1392)가 대진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처음 기술함으로써 대진국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북쪽은 대씨가 차지했으니 곧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라 말했다. 『삼국사기』에서도 대진국의 건국 및 자세한 역사기술은 빠져있다. 『삼국유사』에도 말갈 발해전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두만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많지 않은 대진국 관련 기록과 그 기록의 애매함으로 대진국의 정체성이 왜곡되어 온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역사를 되살리고 보존해야 할 우리들의 무관심이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야 함에도 그 관심은 너무나 일천하다. 후손들의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 이제는 바로 세우자
 
서기 7세기 중국 통일제국인 수와 당의 연이은 침입을 격퇴하여 천하의 중심을 선언한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는 그 후 20년 만에 너무나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패망한 고구려 유민의 망국의 한을 딛고, 역사의 황무지 위에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은 대진국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그 대진국이 우리 역사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거기다 지금은 중국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져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소멸될 위기에 있는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조영이 꿈꾸었던 고구려 부흥의 에너지가 우리 내부에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발해 고왕  대조영(大祚榮)    




?~719(천통 21).
발해의 시조(699~719 재위).

개요

왕호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고구려인의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족속인데 나중에 고구려에 부속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다.


주변정세

당은 668년(고구려 보장왕 27)에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遼東)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遼河) 서쪽인 당의 영주(營州)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즉 그는 당의 전후(戰後) 수습책에 희생되어 요하의 서쪽 영주에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은 일찍부터 지정학적 또는 국방상의 가치 때문에 전국시대 연(燕)의 진개(秦開)가 정복한 이후 역대 한민족 왕조에서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려는 비한족세력(非漢族勢力)을 가로막는 요충지였으며 동방 침략의 근거지였다. 마침 이무렵의 영주 부근에는 고비 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던 투르크족의 돌궐과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거란족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은 이들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통치방법을 써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했다. 당은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에게 송막도호(松漠都護), 손만영(孫萬榮)에게는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주어 무마하면서 통치하고 있었으나, 당시 영주도독 조홰(趙翽)는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이진충과 손만영은 696년 요서지방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예속민들이 굶주리자, 거란의 무리를 이끌고 예속민의 호응을 받아 조홰를 죽인 뒤 당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당은 토벌군을 보내어 그해 10월에 이진충을 죽였으나, 손만영 등은 반항을 계속하여 이듬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이끈 당 군대를 격파했다. 이 난은 돌궐의 힘을 빌려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발해 건국과정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천문령 전투). 그리고 요서지역 거란족의 난으로 신성(新城)의 안동도호부가 공격을 받게 되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의 힘을 빌렸던 당이 결국 이 지역에 있어서 거란 및 해족(奚族)까지 포용한 돌궐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 본국과 요동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당으로서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비단 전략상의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노성(盧城)의 벼와 고대 전쟁에서 최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솔빈(率賓)의 말, 위성(位城)의 철(鐵) 등의 특산물 생산지였다. 대조영은 동으로 빠져나와 먼저 이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점령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야욕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대조영의 자립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력으로 적대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에 당 중종(中宗)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長行岌)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의 수도에 가서 입시(入侍)하게 되었으며, 당과의 평화적 외교의 기틀이 잡혔다. 당과의 화해는 대조영으로서도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돌궐과의 불안한 동맹에서 벗어나 왕국의 영속성을 찾고 발전된 당의 문화 유입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당에서는 대조영을 곧 책립(冊立)하려 하였으나, 거란·돌궐의 침구가 잦아 진국과의 교통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당 예종 2) 최흔(崔忻)이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의 뤼순[旅順]에 상륙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곧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국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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