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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잊지맙시다.

전기실무교육원 2012. 8. 16. 08:52

 

 

 

 

 

 

 

 

 

 

 

 

 

 


자연사랑/독도사랑 

독도사랑/대마도는 우리 땅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을 기억합시다

 

해방이후 한국전쟁(6·25전쟁)을 틈타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행동으로 옮기며 독도를 무단 침입해 들어왔다. 전쟁 중이라 정부는 독도까지는 신경 쓸 겨를도 없는 이 때 분연히 일어선 사람이 바로 제2의 안용복이라 할 수 있는 홍순칠 대장이다.

 

 김교식 씨가 쓴 실화 소설 '아. 독도수비대'를 보면 당시 상황들을 보다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여 부상을 당한 후( 특무상사로 제대) 고향에 돌아와 보니 울릉도의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는 독도를 일본인들이 농단하고 있음에 의분을 감추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 마침내 1953년 4월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당시 그는 교사 출신 박영희와 결혼한 가장이기도 했다. 홍 대장의 활약으로 그 혼란기에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이루어낼 수 있엇고 무인도로 계속 남아 더욱 영토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을 절묘하게 극복한 위업을 남겼다.

 

 독도는 나라가 지킨 것이 아니다. 안용복 장군이 그러했고 홍 대장이 또한 그러했다. 임진왜란은 또 누구의 힘으로 왜적을 물리쳤는가. 의병이 아닌가. 국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소임을 다하고 그리고도 최후엔 번번이 묻히고 핍박 받은 것이 이름 없는 위대한 민초 애국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안용복 장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쌓고도 유배를 당했고 그 이후의 행적은 알지 못한다. 조정에서 그를 죽이고자까지 하였으나 당시 서인 세력들이 권력을 잡고 있은 덕에-그들은 남인에 비해 영토관이 더욱 투철했음-겨우 목숨만 건지게 된 것이다. 실로 안타깝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 역사의 단면이다.

 

동시에 홍 대장 역시 오늘날 독도의 실효적 지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공로로  훈장을 수령하였으나 참석하지 못한 대원들에겐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지 않아 모두 반납하는 부당한 정부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후 홍  대장은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이순신 장군을 상기해보면 될 듯)자식들마저 곤욕을 치렀다. 그는 독도를 위해 조국을 위해 살다가 58세(우리 나이로)로 세상을  떠났다.

 

 홍 대장의 적극적인 대일항쟁에 비해 정부가 행한 대일 독도정책은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울릉도 답사 결과 신 한일어업협정(1998년 11월 28일 체결, 1999년 1월 23일 발효-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이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접근이 과거보다 어려워졌다고 한다.

 

중간수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일본은 중간수역을 한일공동관리구역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독점적 지배를 하던 것을 넘겨준 것이나 같다. 그리고 2000년 1월 1일 방송3사가 독도에서 21세기 첫 일출을  전 국민과 독도에서 맞고자 하였으나 정부가 강력히 반대하여 울릉도에서 해맞이를 하였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1997년 독도에 접안시설이 완공 되었다. 독도 실효적 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중요한 시설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중차대한 상징성을 갖는 시설의 준공식은 당연히 시설물이 있는 독도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도 주무관청인 해양수산부의 주장을  외무부는 일본의 눈치를 보고 청와대와  공동으로 압력을 행사하여 결국 울릉도의 조그만 곳에서 소문 없이 준공식을  치루어 국민을 아연실색케 했다.

 

  일본은 남의 땅을 자기것이라 우기며 저토록 당당하게 주장하고 국제사회에 홍보하며 우리에게 항의 시위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우리가 만든 시설의 준공식조차 숨어서 하듯이 한다는 것은 결국 정부는 일본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정부의 시책은 국민에게 떠밀려 마지못해 국민들의 분노를 무마시키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의심되기도한다. 신 한일어업협정의 체결과정 또한 앞으로 반드시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당시 그런 부분을 지적한 기사도 있었다).

 

 우리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민족이다. 그리고 그 분의 정당한 행위는 한국인은 물론 의를 숭상하는 일본인도 존경하다. 합법성은 나라마다 달리 볼 수 있다. 나라마다 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와 자연법 사상은 실정법은 물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한 인류보편적 숭고한  가치다. 안중근 의사가 숭앙되어지는 이유다.  

 

부디 정부는 대도를 걸어 당당한 주권국의로서 체통을 지켜주기 바란다. 그 점만은 북한에게서 배워야 한다. 일본의 본질을 알지 않는가(이 점은 추후에 예를 들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나 러일전쟁이나 진주만 공습 등에서 선전포고도 없는 선제공격 감행 등 참고할 바 적지 않다).

 

 상기와 같은 배경을 참고로 하시고 아래의 글(디지털울릉도문화대전에서 퍼온 글)을 읽어 주시면 홍순칠 대장의 투철한 독도사랑과 수호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이라 믿는다. 동시에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발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순칠(洪淳七)은 1929년 1월 23일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홍재현(洪在現)이 1883년(고종 20) 4월에 강원도 강릉에서 울릉군 지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홍재현울릉군 지역에 자리를 잡을 당시에는 두 가구만이 울릉군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홍재현과 관련하여 전하여 지는 일화가 있는데 1897년 6월 높은 산에 올랐다가 독도를 발견하곤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 그루를 가져가서 심었다.  다음 해인 1898년에 독도에 갔다가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를 만나 일본까지 동행하여 일본인의 독도 출입을 금지할 것을 당부한 무용담이 전하여 지고 있다.

홍순칠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국군에 입대하여 함경북도 청진(淸津)까지 진격하였으나, 원산 근처에서 전상을 입고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하였다.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왔을 때 울릉경찰서 마당 한 쪽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이 놓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 표목은 일본이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다케시마라 칭하며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는데 이에 대한 확인 표목이었던 것이다. 홍순칠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후 독도를 지키고자 결심하였으며, 1952년 가을에 부산으로 가서 무기 등 장비를 구입하였다.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도의용수비대의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이었다. 이 가운데 3명을 빼고는 모두 6·25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이었으며,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은 홍순칠이 맡았다. 독도의용수비대 조직 시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중기관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등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 1953년 4월 20일에 홍순칠독도의용수비대독도에 도착하여 경비를 시작하였다. 독도의용대는 1953년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하도록 조치하였으며, 1953년 7월 23일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총격전을 벌여 격퇴하였다.

 

그 후 체계적인 독도 수호를 위해 박격포를 구입하는 등 장비를 보충하였다. 1953년 7월에는 국회에서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으며, 준비된 장비는 칼빈 소총 한 자루와 약간의 식량, 간장, 된장 그리고 소주 몇 상자뿐이었다. 1953년 8월 5일에는 독도동도(東島) 바위 벽에 독도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히는 ‘한국령(韓國領)’을 새겨 넣었다.

1954년 11월 21일에는 1천 톤급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함 PS9, PS10, PS16함이 비행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으며, 독도의용수비대와 경찰 경비대의 항전으로 일본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 각서를 제출하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으며, 일본해상 보안청의 함정은 매달 정기적으로 20일에서 24일 사이 출현하였다.

이에 홍순칠은 대책을 마련하고자 주위에 도움을 청하여 경상북도 지사로부터 구호양곡을 도움받기로 하였으나, 미군 고문관 소령은 한국일본이 서로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는 독도분쟁에 미국의 식량을 사용할 수 없다며 구호양곡의 지급을 거절하였다.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도 구하기 어려워지자 홍순칠은 가짜 대포를 생각 해냈다.

포구 직경이 20㎝ 정도이고, 포신이 자유롭게 돌며 에나멜로 단장하여 실제 대포로 보이는 목대포를 설치하였다. 목대포는 후에 일본에서 발간된 『킹』이란 월간지에 「독도에 거포 설치」라는 기사까지 나게 할 정도로 진짜 같았다. 목대포를 설치한 후 일본 측 함정이 나타났지만 그전처럼 근접하지는 않고 먼 곳에서 배회만 할 뿐이었다. 목대포는 독도의용수비대가 1956년 12월 30일 정부에 독도 수비를 인계할 때까지 일본 함정과의 총포전을 막아준 큰 역할을 하였다.

1956년 12월 30일 홍순칠과 마지막까지 남은 독도의용수비대 32명은 무기와 독도 수비임무를 경찰에 인계하고 3년 8개월 만에 울릉도로 돌아갔다.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도에서 10년 동안 탐수 작업을 벌여 1966년 9월 식수를 발견하여 수조 탱크를 설치하고 독도 근해에 출어하는 어민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1983년 6월에 독도 정상에 대형 태극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1986년 2월 척추암으로 57세에 별세할 때까지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을 펼치는 등 독도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

 

 ○ 출처 : 만사종관







독도사랑/대마도는 우리 땅

자연사랑은

어린이들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출처 : 저무는 들녘으로 부는 바람
글쓴이 : 단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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