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당 조만식은 일개 정파의 수장이 아니라 민족의 사표(師表)였으며 세계사에 기록되어야 할 동아시아의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당대의 정치적 기반이 궤멸되는 것에 연연하기보다 후대의 궁극적 승리를 추구했던 정신적 지도자였다.
▲ 고당 조만식 선생
첫째, 간디가 영어로 많은 글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사후(死後) 출간된 ‘간디문집’은 거의 100권에 달한다. 이것이 이후 간디에 대한 세계사적 평가의 기반이 되었던 데 비해, 조만식은 보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많은 글을 남기지 못했다. 둘째, 일본이 임팔전투 등을 통해 인도로 진공하려던 상황에서 영국은 간디를 구심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의 반영(反英) 투쟁세력이 버마의 반영투쟁가 바모처럼 일본과 연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조만식에 대해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악용하고자 했다. 셋째, 남북한의 분단이 지속되면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평양은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고, 그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에서도 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조만식은 평남 강서를 동향으로 하는 도산 안창호가 광복을 미처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이후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에 이어 안창호의 빈자리까지도 물려받았다. 안창호는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미쳤고, 조만식은 이 학교에서 오랫동안 봉직하며 김소월, 함석헌, 한경직, 김홍일, 김기석, 홍종인 등에게 깊은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김소월이 시로써 추앙한 JMS는 바로 조만식의 영문 이니셜이었다.
▲ 고당 조만식 선생의 부인 전선애 여사. 2000년에 작고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이러한 조만식이 주안점을 둔 것은 교육을 통한 후진양성이었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고,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활동을 주도했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1943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던 당시 일본의 협조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즈음 서울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수권(受權) 교섭을 받았듯이, 평남도에서는 조만식에게 차를 보내 평양으로 모셔오고자 했다.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대신 오윤선이 보내준 차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조만식은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이 보낸 밀사(손치웅)를 통해 월남할 것을 요청 받고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광복 이후 조만식은 ‘조선건국 평남 준비위원회’ 위원장,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 등으로 평양에서 활동했고, 북한지역을 해방시킨 소련군도 그를 북한주민의 대표로 대우했다.
▲ 54기 추모회
김일성을 포함하여 당시 북한 지도부에 의해 주도된 6·25전쟁의 포연 속에서 조만식은 이 땅의 많은 민중과 함께 생을 마쳤다. 소련에서 태어나 김일성의 통역을 담당했고,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박사 등의 증언에 따르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한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한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91년 유족이 간직해왔던 유발(遺髮)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북한 민중을 돌보았고 그들과 끝까지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던 조만식의 동상은 현재 경기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 조만식
조만식, 평양서 민족계열인 조선민주당 창당
광복 당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은 어느 한 정파의 지도자가 아니라 38선 이북 지역을 대표하던 민족지도자였다. 미국을 배경으로 활약했던 우남 이승만, 장제스(蔣介石)의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백범 김구 등과 비교하면, 조만식은 철저히 국내의 민중과 함께 했던 민족지도자였다. 조만식은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한 이래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벗어나지 않고 국내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이처럼 국내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지도자라는 점에서 조만식은 광복 이후 서울의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수행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이북지역에서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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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
국내에서 일제의 폭압에 맞서 활동했던 지도자들은 여러 모로 해외에서 활동했던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해외활동가들은 이미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갈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소련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사람의 눈에는 사회주의적 근대의 선진지역이었던 모스크바가 표준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 움직였던 사람의 눈에는 사회주의적 근대를 동아시아에 접맥시키고자 했던 중국 공산당의 노선이 표준이었다. 반면에 중국 공산당과 대결했던 장제스의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사람은 국민당의 노선에 충실했고, 미국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미국적 표준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처럼 각기 다른 큰 바퀴에 올라타고 있었던 해외활동가들은 그 큰 바퀴들이 굴러가는 방향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이에 비해 일제의 폭압에 직면한 국내 활동가들에게는 계급적 입장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민족적 유대감이 존재했다. 해외 활동가처럼 선이 분명하고 호방한 활동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모든 한국인이 해외로 이주할 수 없는 조건에서 국내의 교육운동과 사회운동은 소중한 것이었다. 조만식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간회 역시 바로 그러한 민족적 유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조만식은 이러한 민족적 유대를 기반으로 조선건국 평남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권력공백으로 인한 난세(亂世)를 돌보았다.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G. 메크레르 중좌는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선건국 평남 준비위원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조만식, 부위원장:오윤선, 준비위원: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이주연, 재무부장:박승환, 선전부장:한재덕, 산업부장:이종현, 지방부장:이윤영, 교육부장:홍기주, 섭외부장:정기수, 치안부장:최능진.’
이들 중 이주연과 김광진은 좌파 계열의 인물이었다. 최능진(1899~1951)은 형 능현이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제조 실험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인물이었고, 미국 유학 후 돌아와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최능진은 이후 월남하여 이승만과 같은 선거구에서 출마를 도모하기도 했고, 경무국 수사과장으로 일하다가 권고사직된 이후 1951년 김창룡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됐다. 한근조는 조만식과 마찬가지로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2년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이후 평양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조만식이 회장으로 있던 조선물산장려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좌파 인사의 변호를 맡아주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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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정월 초하루 고당이 장로로 있던 평양 산정현 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끝이 고당선생이다. |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이후 ‘조선건국 평남 준비위원회’는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 1945년 8월 26일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확대·개편되었고, 좌우파간의 균형이 역전되었지만 위원장은 여전히 조만식이 맡았다. 부위원장직 두 자리는 오윤선과 조선공산당 평안남도당부를 이끌던 현준혁이 맡았다. 평남 개천이 고향이었던 현준혁은 연희전문과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수재였는데, 조만식을 공대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현준혁이 9월 3일 트럭을 타고 가다 암살당할 때도 조만식은 그와 함께 동승한 바 있었고, 당시 긴급하게 현준혁을 구명하고자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조만식-현준혁을 통한 좌우의 협력관계는 이후 조만식-김일성을 통한 협력관계로 바뀌게 된다.
1945년 9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 정치장교 메크레르 중좌의 소개로 처음 김일성과 만나게 된다. 김일성은 과거 만주에서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만나면 그랬던 것처럼 조만식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은 조만식의 숭실학교 5년 후배이기도 하였고, 김일성의 외가인 강(康)씨쪽은 기독교 계통으로 조만식과 여러 인연을 맺고 있었다. 동유럽에서 공산당 지도자보다 민족지도자를 앞세웠던 소련 역시 최고지도자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조만식을 앞세웠다. 이후 조만식은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아주었고, 인민정치위원장의 명의로 10월 16일 혹은 17일 평양의 요리집 가선(歌扇)에서 김일성 가족을 위한 환영연을 베풀어 주는 등 소련군이 진주해 있던 북한의 정국을 평화적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민족·민주계열의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黨首)가 되었다. ‘105인 사건’을 기념하여 105인의 발기인을 두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다. 당수에는 조만식, 부당수에는 이윤영과 최용건이 선출되었다. 최용건은 조만식이 교장으로 봉직했던 오산학교를 다니다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당시 소련군과 김일성도 조선민주당의 창당을 적극 권유하고 지원하였다. 김일성은 10월 8일 소련군 38선 경비사령부에서 이루어진 박헌영과의 비밀회담을 통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건설에 합의한 이후 공산당 조직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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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만식 선생이 청년학도 시절을 회고한 글을 기고했다. |
1945년 12월 말 얄타회담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미·영·소 3국 외상의 협정문이 발표됨에 따라 조만식은 중요한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 등의 추축국(樞軸國, 2차대전 때 일본·독일·이탈리아가 맺은 3국동맹을 지지하며 미·영·프 등의 연합국과 대립한 나라)들로부터 받아낼 전후보상 및 이 국가들과의 평화조약에 관한 합의’로 시작되는 이 협정문은 ‘임시 한국 민주정부(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중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문구가 쟁점이 되었다. 찬·반탁 구도는 38선 이남의 이승만과 김구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38선 이북의 조만식에게는 정치적 몰락을 불러왔다.
1946년 1월 5일 인민정치위원장으로서 이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연금상태에 처해진 조만식은 1946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과 이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 서울을 방문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대표는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 4월 김욱이라는 밀사를 조만식에게 파견하게 된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이윤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만 이 문서를 보여준다’는 전제하에 서명했지만 결국 문서가 공개되자 급거 월남하였다.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마저 밀사사건으로 월남하자 또 한 명의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소가 공동으로 지지했던 모스크바 협정문의 수용 여부를 놓고 조만식의 북한 내 정치기반은 급속도로 궤멸되었다. 반탁에 대한 조만식의 입장은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차이가 있었다. 1947년 7월 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 대표단장 브라운에게 밝힌 조만식의 발언 역시 신탁통치 여부보다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 여부를 더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했던 조만식의 입장에서 신탁통치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조만식은 개인의 지위보다 민족적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당대의 정치무대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광복 이후 민족의 통합과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조만식이 북한에서 정치적 입지를 상실함으로써 남북은 4년 후 ‘근대 세계사의 6대 전쟁’의 하나로까지 일컬어지는 6·25전쟁을 향해 치닫게 되었고, 조만식도 퇴각하던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조만식이 38선 이북지역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조만식을 따르던 사람들이 월남함으로써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휠씬 수월하게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를 이북지역에 수립할 수 있었다. 조만식은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자신의 곁에 남아서 투쟁해 주기를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였던 평화주의자의 일관된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은 역(逆)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조만식의 뜻을 받들어 월남한 인사들이 남쪽 지역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친화적이었던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조만식은 ‘교정 가능한 체제’로서의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계승한 후예들을 통해 그 교정과정에까지 길고 깊은 빛을 남겼다.
조만식 약력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 출생
-1905~1913년
· 평양 숭실중학교,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
·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함
-1915~1919년
· 오산학교 교장 취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1년 복역
-1920~1926년
·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평양 YMCA 총무
·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 발기, 민립대학기성회 조직
· 숭인중학교 교장
-1927년 신간회 결성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
-1932~1943년
조선일보사 사장,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 협조 거부
-1945~1946년
·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 조선민주당 창당, 반탁운동전개
-1950년 한국전쟁 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
1937년 정월 초하루 고당이 장로로 있던 평양 산정현
교회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 끝이 고당이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정외과
조만식 -그는 누구인가?
일제에 비폭력 저항한 ‘한국의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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