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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종대왕의 약사

전기실무교육원 2010. 9. 23. 20:39

세종대왕의 약사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43년(세종 25)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46년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출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이천에게 명하여 경인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을 써서 5교 양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을 금지했으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해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훈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 이순지 등을 시켜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서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고, 천문, 역법, 의상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많았으므로 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 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D대한 지위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을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존 양변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 곳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정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보고는 19년(세종1)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름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

-> 세종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결혼하다.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된다.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르다.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하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전국에 펴내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우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하다.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설치하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들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야인(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정하여 실시하다.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짓다.
1446년(50세,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하다.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3월 16일) 승하하다.

 

진정한 천하를 얻은 군주, 세종대왕


왜 세종대왕일까

태종(太宗) 18년(1418) 6월 3일 그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폐세자가 되었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달 후인 8월 10일 태종은 보위를 충녕대군에게 물려주었고, 충녕대군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는 이후 32년간 실로 한 시대에 이뤄졌다고 믿기 힘든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승하했다. 그에게는 ‘세종’(世宗)이라는 묘호(廟號)가 붙여졌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 그 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종대왕. 초등학교 때 동상으로나마 한 번쯤 뵈었을 세종대왕(심지어 그가 살지 않은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에서도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는 웃지 못할 현실이 있긴 하지만). 늘 우리 곁에 함께 하는 세종대왕. 그런데 우리는 그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집현전(集賢殿), 앙부일구(仰釜日咎), 자격루(自擊漏)…. 대체 이것들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아니, 우리는 세종대왕의 인간상이나 그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의 거룩하고 위대한 사랑에 관해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세종대왕을 알아가고 공부해가면서 무수히 나에게 던져진 의문들이다.

2007년 12월.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가 뽑혔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2008년 1월 오랜만에 세종대왕을 다룬 극이 방영된다고 한다. 극작가 신봉승(辛奉承)이 사극<조선왕조 500년> ‘뿌리깊은 나무’ 편에서 세종대왕을 다룬 이후 거의 30년만이다. ‘전혀 새로운 감성의 드라마’라는 표현에서 뭔가 탐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극에서는 세종대와 같은 치세는 잘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루하고 밋밋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세종대가 실로 믿기 힘든 태평(太平)의 시대였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런 세종대왕이 다루어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세종대왕일까?” 그것은 세종대왕과 그의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그만큼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지도자상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탁월한 정치가 세종대왕

이 책은 바로 그런 세종대왕의 지도자상,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을 비롯한 적지 않은 사료와 수십 여 개의 참고문헌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그것을 ‘수성(守成) 리더십’이라 부르고 있다. 사실 ‘겨레문화의 샘터’이며, ‘운암호에 가득찬 많은 양의 물’처럼 방대한(이 표현은 이 책의 169쪽 참조) 세종대의 정치와 문화에 관한 수많은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가 있었고, 그 성과는 한 권의 책으로 쉬이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기존의 연구 방향에서 조금 빗겨나 그의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데 독특한 점이 있다. 하기야 문화가 꽃이며, 그 줄기가 정치임을 고려한다면 정치, 특히 그 정점에 있는 지도자(국왕, 대통령 등)의 중요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매우 이 책은 그 점에서 신선한 느낌마저 가지게 한다(?).

정치가 세종대왕의 모습은 어땠을까? 어떤 리더십으로 한 시대를 이끌어갔을까? 이 책은 다양한 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그는 타고난 재능과 엄청난 노력으로 갖추어진 방대한 학문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의 난제들을 풀어나갔다. 역사상 성군(聖君)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면모를 보면 학문 수준이 높은 이들이 적지 않다. 세종대왕은 그 가운데 최고봉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원래 한 번 본 책은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기억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수백 번, 심지어 수천 번까지 읽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이야기한다지만 그것은 세종대왕 앞에 대면 한없이 미약할 뿐이다. 그가 세자 시절 책을 너무 많이 읽어 태종이 내관을 시켜 책을 모두 수거하게 했는데, 그 가운데 떨어진 구소수간(歐蘇手簡)을 수천 번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둘째, 그는 무서운 집념과 자기 통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부왕인 태종에 의해 장인의 가문이 풍비박산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등 개인적으로 엄청난 불행을 겪었으며, 시종일관 병마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개인의 아픔을 찬란한 정치의 밑거름으로 삼는 놀라운 면을 보여주었다. 과연 이런 무서운 자제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셋째, 그는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을 낮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최강국이었다. 그런 중국을 상대로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명분과 실리로 대해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수없이 몸을 낮춰야 했고, 그는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데 개인의 체면이나 명예가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넷째, 그는 탁월한 인재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데 노력하였으며, 또한 등용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그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특히 집현전 관리들은 수십 년 동안 다른 관직을 못하게 하면서 오직 학문 연구와 교육 등에만 몰두하게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유례가 드물다.

그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청백리 중의 청백리이다. 유관(柳寬), 허조(許租), 변계량(卞季良),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최만리(崔萬里), 김종서(金宗瑞), 최윤덕(崔允德), 이종무(李從茂), 장영실(蔣英實) 등 정말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그들이 모두 세종대에 활약했다.

이들은 세종대왕의 뜻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뜻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찬란한 정치와 문화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태평천하(太平天下)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시대를 이들은 만들어갔던 것이다.

다섯째, 그는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정치를 펼쳤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이 조금 못 되는 시기, 이 땅에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여종과 그의 남편에게 출산휴가가 주어지는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졌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고 중화라는 자부심을 건들 수도 있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세종대왕은 진정한 유학의 나라라는 이상을 실현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훈민정음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관철시켰다. 만약 훈민정음이 없었다면 나는 이 글을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쓰고 있거나 아예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섯째, 그는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중용(中庸)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며, 그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합하여야만 진정한 정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의견을 경청하되 결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치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중용의 미학이 필요하다. 세종대왕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현실 정치에 정확하게 적용시켰다.

세종대왕에게서 발견되는 지도자상은 이것 말고도 무수하다. 이 책은 그런 지도자상을 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사대(事大)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풀어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훈민정음 창제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풀어내고 있는데, 이 부분이 특히 많은 공감이 갔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이것이 앞으로의 문화콘텐츠로서 큰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가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국역본으로 1만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세종장헌대왕실록> 하나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현재의 우리 문화의 힘은 지금보다 몇십, 몇백 배 커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정치가로서의 세종대왕을 다루다보니 그의 개인상이 간과된 느낌이 든다. 이는 세종대왕과 정조(正祖)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영조(英祖)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둔 데에는 물론 정치적인 문제도 있지만, 영조와 사도세자 개인의 문제도 분명히 있다. 그것을 지나치다 보니 인물을 면밀히 파악하는데 다소 한계를 보여준다.

황희에 관한 설명도 아쉽다. 능력이 있다면 도덕성은 다소 등한시해도 괜찮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황희의 매관매직과 같은 일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황희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런 면들을 충분히 불식시킬 만큼 충분히 청백리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황희가 그렇게 명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탁월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자신의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도덕성이 뛰어난 면을 보여준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지나치고 있는 것은 다소 아쉽다.


세종대왕과 그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

한 사람의 아름다운 삶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더구나 수많은 것을 가진 이른바 ‘가진 자’임에도 그것을 과감히 내팽겨치면서 자신의 주변, 크게는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세종대왕은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다.

세상에는 뛰어난 군주들이 많이 살다 갔다. 하지만 세종대왕만한 이를 찾기는 힘들다.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준 것, 훈민정음의 창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만을 해낸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과 그를 보좌하는 충직하고 명석한 신하들은 실로 한 군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기 힘든 수많은 일들을 해냈고, 수많은 책들을 만들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여겼던 조선의 기반을 더욱 탄탄히 다지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는 직서주의를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고려의 역사를 코레아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여기게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실록(實錄)을 4부, 그것도 활자본으로 편찬하게 하면서 동아시아의 다른 실록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수많은 과학기구들은 백성들의 생활을 편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명품들이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한글로 지어진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매,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매,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라는 천하의 명문은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찬란하고 위대하다.

훈민정음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혁명 중의 혁명이었다. 갑인자(甲寅字)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금속활자였다. <칠정산>(七政算)은 조선은 중국과 다른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을 분명하게 보여준 명품이었다. 이 말고도 무수한 업적이 있으며, 이 모든 일들이 세종대에 이루어졌다. 이것만 미뤄보아도 세종대왕은 진정한 천하를 얻은 군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아픔과 그 아픔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지극한 마음으로 승화시켜 정치를 해나간 세종대왕의 면모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한다면 그가 왜 진정한 천하를 얻은 군주인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이상 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키려 노력했으며, 그 나름의 시대상에서 그것은 상당 부분 실현되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화라는 좋은 여건이 주어짐에도 끝없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을 돌이켜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의 우리 정치를 보자. 해방이 된 지 60여 년이다.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과 염원으로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대통령이 자신의 재위 시절 통치 기록을 집에 가지고 가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가히 위험수준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역사가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침없이 지껄인다. 우리 국방부는 자주국방을 외치고 있다. 그게 맞는가? 그렇다면 주한미군은 왜 아직도 우리 땅에서 저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어 우리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가?

과거 조선은 중국을 큰 나라로 섬겼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군대가 우리 땅에 들어와서 돌봐주는 따위의 일은 없었다. 무슨 놈의 자주국방. 어림없는 소리이다. 그러니 이라크 파병같은 국가의 막중대사에 미국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줏대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에서, (현재까지의 역사 가운데)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세종대왕에 미치는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가는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것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비참한 정치 현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분명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극복해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 답은 지난 날의 우리 역사 속에 있다. 세종대왕과 그 시대가 새삼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이다. 이 책은 그 점에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지금이라도 세종 정치의 사례를 여러 측면에서 발굴하고 소개해 “문화창조·민생애육의 생명수를 기세 좋게 콸콸 흘러내리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만 수천 마지기 논의 벼모가 모두 일제히 생기를 띠고 자라나고 피어나, 가을 하늘 맑은 바람에 황금의 물결을” 이루게 해야 한다.

실로 <세종실록>은 우리 모두가 목욕하고도 남을 문화콘텐츠의 보고이며, 용기와 믿음을 주는 희망 정치의 생명수이기 때문이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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